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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세계테마기행

세계문명기행 오스트리아편

Elohist 2018. 8. 9. 21:28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오스트리아는 18세기까지 유럽 전역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대했던 나라예요. 오스트리아 왕은 한때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은 유럽 여러 나라 왕과 왕비가 됐지요. 당시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정치·문화 중심지였어요.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 매우 많답니다.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빈에는 오래된 명문 '빈 대학교'가 있어요. 1365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설립한 빈 대학교는 6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성의 요람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지요. 빈 대학은 처음 문을 열 때 법학·의학·문학 세 학부만을 운영했지만, 곧 사회과학·경제학·수학·지구과학·지리학·천문학 등 다양한 학부를 설립해 많은 분야에서 인재를 배출했답니다. 정신분석학 저서 '꿈의 해석'을 쓴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설명하기 위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고안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오스트리아 빈 대학 출신이지요.

빈 대학의 캠퍼스는 빈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그중 주요한 건물은 도심을 둘러싼 링 모양의 순환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 sse) 근처에 위치해 있지요. 링슈트라세 주변에는 오스트리아 역사의 깊이를 보여주는 고딕·바로크·르네상스 양식의 전통 건축물들이 몰려 있답니다. 지난 2001년 유네스코는 이 일대를 포함해 오스트리아의 '빈 역사 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어요.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의 정치와 음악을 선도했던 에는 당시 세워진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요. 1220년 건축되어 600여 년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들이 살았던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은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예요. '이전 황제가 사용한 방을 다음 황제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에 따라 왕궁이 수세기에 걸쳐 증축돼 무려 방이 2600개나 된답니다. 왕궁 예배당에서는 일요일 예배 때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불러요.

음악의 도시라는 칭호에 걸맞게 유럽의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등 거장들이 생활했던 건물들이 도심에 자리 잡고 있답니다. 모차르트가 잠시 살았다는 '피가로 하우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던 성 슈테판 대성당이 대표적이에요.

14~15세기에 걸쳐 완성된 성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사원으로 성당 내부의 조각상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이나 아름답지요. 대성당의 지붕도 화려한 금색과 청색의 모자이크로 꾸며져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답니다. 성당 안에 안치된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석관과 지하 유골 안치소 카타콤은 엄숙한 분위기를 더하지요. 성 슈테판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아픈 역사가 있지만, 꾸준한 복구 작업으로 현재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어요. 오늘날에도 빈 시민들은 성금을 모아 대성당의 보수를 돕고 있지요.

빈 역사 지구는 도시와 건축물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2000여 년 동안 서로 영향을 끼쳐온 다양한 문화가 함께 깃들어 있어 매우 가치있는 곳이에요. 다만 안타까운 점은 무분별한 도심 개발로 인해 전통적인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유네스코는 지난 2004년 빈 역사 지구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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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0] 철의 여인만이 링슈트라세 한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었다

빈·쇤브룬=송동훈 문명탐험가
2018.08.09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기후이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울의 사우나 폭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의 여름도 과거보다는 훨씬 더워졌다. 에어컨이 없어도 충분했던 빈의 여름나기가 힘들어졌다. 다행히 이 도시는 습하지 않고 바람도 시원해 그늘에만 들어가면 숨이 트인다. 전체 시(市)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녹지 덕분일 수도 있다.

빈 여행의 핵심인 링슈트라세(환상도로)는 더 시원하다.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환상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그렇게 이어진 나무 그늘을 따라서 돌면 한낮 땡볕 아래에서도 쾌적하게 도심을 둘러볼 수 있다. 예외는 링슈트라세의 중심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을 감상하려면 나무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상징하는 장중한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중후반 합스부르크 제국과 유럽을 움직였던 수많은 사람이 기마상으로, 입상으로, 부조(浮彫)로 자신을 뽐내고 있다. 어린 모차르트도 보인다. 그리고 그 모두의 위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군림하고 있다.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녀에겐 어머니의 인자함이 묻어난다. 실제로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링슈트라세는 1850~1890년대에 개발됐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당연히 왕조가 배출한 군주들의 동상을 여기저기 세울 만했다. 그런데 그녀 한 명뿐이다. 모든 남자 황제의 동상은 궁전 뜰에 있거나, 뒷골목에 있거나, 공원 한구석에 있다. 그마저 남기지 못한 황제도 많다.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링슈트라세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를 중심으로 영웅광장,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뮤지엄 콰르테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이 광장 앞에는 대형버스들이 끊임없이 멈춰 서고 수많은 여행객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빈을 만끽하기 전에 예외 없이 그녀 앞으로 걸어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왜? 그녀가 마리아 테레지아이기 때문이다.

◇鐵의 여인, 美의 궁전을 짓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긴 가장 유명한 건축 유산은 쇤브룬 궁전이다. 궁전은 빈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단아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궁전 외관이 초록 숲, 만발한 꽃의 정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로코코 양식의 궁전 내부는 화려함의 절정이다. 그러나 쇤브룬 궁전이 유명한 건 우아한 외관도, 화려한 내부도, 아름다운 정원 때문도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을 넵튠 분수 뒤편에서 조망한 모습. 마리아 테레지아는 중국풍·일본풍·인도풍으로 다양하게 방을 꾸밀 정도로 쇤브룬에 애정을 쏟았다. /

마리아 테레지아 때문이다. 이곳은 군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치열했던 그녀의 인생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녀는 171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首長)인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름다운 소녀였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문제는 그녀에게 남자형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스릴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740년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조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여자 상속자는 가문이 빈에 자리를 잡은 13세기부터 4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帝國을 상속받다

'처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카를 6세도 이에 대비해 자신의 딸이 제국 상속을 가능하도록 명시한 '국본조칙'을 유럽 각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는 건 상대방의 선의도,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문서도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힘뿐이었다. 카를 6세는 어리석게도 그걸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프로이센의 청년왕은 "슐레지엔만 넘겨주면 다른 적들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슐레지엔을 양보하면 프리드리히 2세는 더 많은 것을 원할 것이며, 합스부르크의 약세를 눈치 챈 프랑스와 바이에른 등 다른 열강들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정치와 군사를 몰랐지만, 과감하게 타협을 거부했다.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전(敗戰)의 연속이었다.

100년 넘게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자원이 고갈됐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오래된 거대 제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남편도, 신하들도 협상을 주장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돈도, 신용도, 군대도, 경험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적절한 조언조차 구할 수 없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회고) 안으로는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밖으로는 사방에서 적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강철 같은 의지와 탁월한 전략으로 적에 맞섰다. 슐레지엔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나머지 제국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다.

◇나라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피디아

제국의 해체는 막아냈지만 한때 온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체면은 엉망이 됐다. 오랜 세월 신하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순순히 슐레지엔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힘으로 빼앗긴 땅을 힘으로 되찾아올 속셈이었다. 복수전은 재상 카우니츠(Kaunitz)와 장군 다운(Daun)에게 맡겨졌다. 카우니츠는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의 주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제안했다.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 남편을 비롯한 각료 대부분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동맹의 가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적(敵)은 더 이상 프랑스가 아니었다. 적은 바로 슐레지엔을 강탈해 간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을 꺾으려면 반드시 프랑스의 힘이 필요했다. 자존심 대신 생존을 선택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6년 카우니츠를 내세워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어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시작한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프리드리히 2세를 죽음 직전까지 밀어붙였지만 승리까지 따낼 수는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패배를 인정하고 내정 개혁에 몰두했다. 그녀의 치세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늘날 동유럽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토에 더 깊이 뿌리내렸고, 영토를 굳게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마리 앙투와네트를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루이에게 시집보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15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의도대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죽을 비참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브룬을 사랑했다. 중국풍, 일본풍, 인도풍으로 다양하게 장식된 방들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이 궁에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나랏일로 바빴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슈테판 1세와 사랑했고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여자였던 탓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상 그녀만큼 '황제'에 어울렸던 사람은 없었다. 그녀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주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진정한 백미(白眉)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쇤브룬 궁전이 그러하듯이.

마리아 테레지아 자녀 16명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등 대부분 佛 부르봉家와 결혼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주인인 동시에 아내였고 엄마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대인 로트링겐이란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작령(領)의 상속자인 슈테판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부부 사이도 아주 좋았다.

1737년 첫딸을 시작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16명의 아이를 낳은 게 이를 보여준다. 그녀는 재위 초반 16년 동안 전쟁과 국사(國事), 임신과 출산을 병행하다시피 했다. 국익을 위해 자녀 대부분을 프랑스 왕실인 부르봉(Bourbon) 가문 출신과 결혼시켰다.

그녀의 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막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있다가 혁명 때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일보 A21면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0] 철의 여인만이 링슈트라세 한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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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으며 유럽역사 공부 하네요.
너무 재미나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연결되어 머릿속을 정리해주니 더욱 감사해요.
20년전에 다녀온 오스트리아 빈!!
역사도 알고 여행 가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올 거에요.
요즘은 각 나라 여행 정보뿐 아니라 역사 기행  프로그램도 많아서 그 나라 이해하는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